“시작이 느린 대신 중간에 포기 안 하고 완벽하게, 열심히 하려 하죠.” 느리지만 견고하고, 진실돼서 더 찬란한 최광록의 느림의 미학.
|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막방이 6월 초였는데, 그새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요. 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마지막 촬영이 3월 초 끝났으니까 이제 5개월 정도 지났어요. 배역 때문에 30킬로 가까이 증량했던 몸무게를 20킬로 후반 가까이 뺐는데, 나름 건강하게 감량했어요. 서른 중반이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건강한 식단에 운동을 병행했네요.
| 와, 다이어트 쉽지 않았을 텐데. 또 어떻게 지냈어요?
최근엔 저만의 일상을 좀 보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곳들을 많이 가려 했어요. 반려묘랑 시간 많이 보내고, 커피를 되게 좋아해서 카페도 다니고, 얼마 전엔 오사카 도보 여행도 다녀왔고요. 이제는 또 다음 작품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있는데…
| 차기작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만 기사로 접하겠습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보면서 형태가 계속 눈에 밟혔어요. 무뚝뚝한 듯 다정하고, 진지한데 엉뚱해서 자꾸만 시선이 가는 캐릭터랄까? 평소 성격과도 닮았나요?
사실, 처음 대본을 볼 때는 항상 막막한 것 같아요. 데뷔작 <그린마더스클럽> 때도 그랬는데, 캐릭터가 저와는 너무 다른 인물 같아 장애물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공통점을 찾으려 계속 노력했어요. 연기하는 인물이 저와 정말 똑같다고 느낄 정도로.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형태가 나중엔 진짜 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형태와 최광록. 어떤 점이 닮은 것 같아요?
형태가 좀 말이 없잖아요. 저도 지금 말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평소에는 말이 없거든요. 그 부분도 비슷하고, 저도 형태처럼 행동을 먼저 하는 편이에요. 뭘 하더라도 말하기 전에 그냥 바로 일을 시작하는?
| 신인 배우 축에 속하지만, 직장인이라 치면 ‘중고신입’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것 같아요. 배우가 되기 전 이력이 많잖아요. 법학을 전공해 항공 승무원을 하고, 영어 강사, 모델까지. 이 모든 결정은 나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그랬던 거겠죠?
그 질문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친구의 친구들까지 물어봤거든요. 저보고 그만두는 걸 잘한다고. 하하. 법학이라는 걸 전공하고, 그걸 옆으로 치워 놓은 상태에서 승무원이 됐다가, 그것도 치워놓고 다른 일을 쭉쭉쭉 해왔는데 ‘밀고 나가자’는 내적인 확신보다는 후회를 안 할 자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해도 항상 후회는 안 했거든요. 이게 안 되면 그냥 다른 거를 택하면 되니까.
| 그게 진짜 어려운 거 아닌가요? 후회 안 하기.
사실 직장 그만두고 처음엔 후회하긴 했어요. 괜찮을 줄 알고, ‘내 꿈을 찾아가자’고 생각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무래도 생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잖아요. 그래서 알바를 엄청 많이 했어요. 노가다도 하고, 택배 일도 하다 영어 강사 일은 그 뒤에 한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많이 했는데, 밤이 되면 ‘내가 지금 뭐 하려고 여기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긴 했죠.
| 그런 과정이 있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지금의 순간이 더 값지게 느껴지겠네요.
그렇죠. 최종적으로는 후회 없는 선택이었으니까요.
| 한 인터뷰에서 이랬어요. “직장 생활할 때는 나무만 보다가, 그만두고 나서야 숲을 본 기분이 들었다”고.
직장생활을 할 때는 하루 중 너무 많은 시간을 그 곳에만 쏟아붓다 보니 정작 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더라고요. 일터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생활까지 끌고 와서 나를 망치기도 하고,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 안에서 잘하려고 애쓰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우물에 갇혀 있는 것 같단 느낌도 많이 들었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퀘렌시아’처럼 편한지,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거고 어떤 가정을 이끌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로 거기에만 너무 몰두했던 거죠. 그렇게 나무만 보다가, 거기서 한 발자국 빠져나오니 이런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 이런 이력을 보면서 <유 퀴즈> 게스트로 나가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마다 출연자에 따라 ‘누구보다 간절하다’, ‘한 끗 차이’, ‘장안의 화제’ 등 지어지는 소제목이 있는데, 광록 씨가 출연한다면 어떤 소제목이 어울릴 것 같아요?
음… <유 퀴즈>가 저를 불러줄 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감사하게 불러 주신다면 ‘슬로우 스타터’가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느린 게 좋거든요. 여태까지 항상 뭔가를 빨리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직업도 너무 오랜 시간을 우회해서 돌아왔고, 승무원 일도 되게 느리게 돌아와서 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슬로우 스타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작이 느린 대신 중간에 포기 안 하고 완벽하게, 열심히 하려 하죠.
| 조금 돌아갈지언정 결국 원하는 길로 가는 것. “오아시스가 내 최종 목표라면 옆에 사과나무가 있을 수도 있고, 배 나무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식으로 목표를 생각했다“는 과거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그 말을 제가 처음 들었던 게 KBS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패널로 나왔던 홍진경 선배가 그 조언을 사연자한테 해줬거든요. 어린 마음에 그걸 제 모토처럼 가지고 살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한테 공감을 이끌어내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지만, 유명한 배우는 못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못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오늘처럼 이런 재미 있는 일들을 하면 그것들이 과실이 되는 거죠. 훌륭하거나, 남들이 다 알아주는 배우가 되지 못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 29살에 모델에 도전했고 31살에 배우가 됐어요. 특이한 게, 데뷔작 <그린마더스클럽>에 캐스팅된 후에 연기 공부를 처음 시작했다고요. 우연히 마주한 기회였는데, 그게 또 좋아하는 일이 되어버렸네요.
지금은 연기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사실 그때 당시만 해도 되게 무서웠어요. 저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평범하게 사회가 정한 특정한 틀에 맞춰 성장해 왔고, 집안도 보수적인 편이라 부모님은 제가 대중에 많이 노출되는 일을 하길 원치 않으시기도 했거든요. 그렇게 무서워 하고만 있었는데, 연기하는 친구에게 이걸 배우면서 연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 거죠. 연기에는 그런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 같아요. 연기를 얕게 보고, 흉내만 낸다는 느낌으로 생각하고 대하면 사람들도 다 알거든요. 카메라는 거짓말을 참 잘 잡아내는 것 같아요. 대신 내가 조금 스킬이 부족하고,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이 작품과 인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고, 진심이라면 감동이 온전히 전해지더라고요. 그게 연기의 묘미인 것 같아요.
| 그런 연기라는 새로운 분야를 경험하고 바뀐 점이나, 새롭게 느낀 점이 있나요?
MBTI를 엄청 믿지는 않지만, 제가 T거든요. INTP. 연기를 시작하기 전엔 상대방에게 겉으로 공감해주는 척하기 위해 자상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쓰면서도, 마음 깊이 공감해주진 않곤 했어요. 감정을 이입하게 되면 하루가 너무 피곤해지니까. 그런데 연기를 시작하면서 겉으로만 하는 공감 말고, 내가 진짜 이 사람의 말에 공감해 주고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그릇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또 제 연기의 진솔함을 더하는 그런 재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점에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 오히려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내키지 않는 공감을 해 주는 일종의 연기를 하다가, 연기를 하게 되며 한층 더 진솔하게 삶을 대하게 된 거네요?
지금도 가끔은 포장을 하긴 하죠. 그런데 그 비율이 줄었어요. (웃음)
|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하나씩 얻을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요.
제일 나쁜 경험은 얻는 게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뭔가에 열정을 쏟았다면 얻는 게 있어야 되잖아요. 저는 각 작품마다 얻은 게 달랐던 것 같아요. 각 시간대의 제가 다 다른 모습이기도 했고요. 2022년 <그린마더스클럽> 때는 감사함에 대해 많이 알게 됐고, 연기가 참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됐죠. 그때 ‘어,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장애물을 느꼈다면 이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할 때는 따뜻함을 많이 느꼈어요. 작중 분위기 그대로 너무 좋은 현장이었거든요. 노형태라는 인물이 형태가 없는 ‘노’ 형태 상태였다가 형태가 생긴 것처럼, 저도 진짜 형태가 생긴 최광록이 되는 과정을 같이 겪었어요.
| 형태가 생긴 최광록은 어떤 사람이에요?
자기 확신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데 너무 눈치를 많이 보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 썼다면 지금은 내 일, 내 연기, 내 작품 등 제 신념과 관련된 일이라면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바뀌었죠.
| 영화 얘기도 하고 싶어요. 단편 영화도 제작했다고 봤는데, 정보가 많이 없더라고요.
<벌스데이 맨>이라는 작품이에요. 처음에 연기 시작할 때 배우로 활동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스터디를 했는데, 그때 습작식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ASMR이 크게 유행할 때 관련 콘텐츠를 찾아보다가, 19세 ASMR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되게 특이하죠? 그게 듣는 이들의 성적 판타지를 채워주는 ASMR인데, 사람이 혼자 독백식으로 연인에게 생일 이벤트 같은 걸 해 주는 상황극 같은 걸 녹음하는 거예요. 숨소리도 이렇게 내면서. 그걸 토대로 만든 영화인데 처음엔 커플인 듯한 남자가 등장해서 여자한테 생일 축하도 해 주고, 마사지도 해주는 야릇한 상황이 펼쳐지다 갑자기 땅! 깨지면서 화면이 전환되는 거죠. 알고 보니 남자는 마이크를 두고 ‘자기야’ 이러면서 혼자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고, 여자는 외로워서 퇴근하고 항상 그걸 들었던 거예요. 마지막엔 혼자 “생일 축하해” 말하고, 초를 훅 불면서 끝나는 그런 영화예요.
|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잘 반영한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보여주실 생각은 없나요?
편집은 사실 다 됐는데, 부끄럽지만 영화제에 낼 수 있으면 내 봐야죠.
| 이런 소재에 대한 영감은 일상에서 자주 얻나 봐요.
이상한 상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또 재미있는, 연기와 관련된 상상들이 조금씩 나오기도 하고요.
| 연기와 다른 영화 제작만의 매력은요?
일단 앞으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벌스데이 맨> 때는 친구들과의 패기와 열정으로 한 거지, 쉽지 않더라고요. 물론 연기자도 연기를 하는 플레이어인 동시에 신을 책임지는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지만 연출은 조금 더 거시적으로 많이 보고 세세하게 신경을 더 많이 써야 돼요. 그런 점이 연기와 다르기도 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연기에만 집중하는 걸로.
| 좋아하는 감독으로 쿠엔틴 타란티노를 꼽으며 “영화와 예술이 어떤 메시지를 주기보다 즐겁고 카타르시스를 주면 그게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하신 적 있죠.
그게 좀 강하게 적히긴 했는데, 어려운 건 제가 거부감이 들어요. 아름다움과 작품성은 너무 와 닿지만, 더 많은 대중을 한번에 공감시키는 작품이 저는 더 재미있게 느껴져요. 사람마다 재미의 정의가 다르겠지만, 제겐 그런 게 재미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이라는 작품을 택한 것도 있고요. 저한테도 재미있어야 되고, 보는 사람에게도 재미있어야 되니까요. 실제로 촬영하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지금까지도 너무 친하게 지내고, 이렇게 따뜻한 현장은 많이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 그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 아닐까요? 그래서 더 최광록의 다음 챕터가 궁금해요.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챕터가 항상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목표나 계획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제 챕터를 정하는 것보다는, 제게 주어진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고 그냥 올인을 해 보고 싶어요. 주어진 순간에, 한 작품에 모든 걸 다 태워버리는 거죠. 저는 항상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이게 제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히어로는 아닙니다만>도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좋은 기회가 왔고, 그것 역시 제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임할 거고.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여러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 얼마 전 광록 씨의 피드에서 웃긴 댓글을 봤는데, 보셨어요? “왜자꾸 B컷 사진만 올리지..., Best(최고의)컷, Beautiful(아름다운)컷, Bright(빛나는)컷, Blessed(축복받은)컷, Buy(제가구매합니다)컷, Bring(제가썸쳐갑니다)컷, Breathe(숨이트이게해주는)컷, Benefit(개이득)컷, Burn(마음이화끈해지는)것, Bend(감삼다하면서허리숙이게해주는) 컷, Battery(사랑의배터리)컷.”
네, 하하. 재밌죠. 살면서 누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경우가 없잖아요. 심지어 연인도 그런 식으로 말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고요. 그런 걸 들을 때 너무 고맙고, 귀엽고, 감사하죠.
| 그렇다면 영상이긴 하지만, 오늘 촬영은 어떤 B컷이 될 것 같나요?
Bend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은.
| 왜일까요?
이승국 님 있잖아요, 영어로 할리우드 배우 인터뷰하는 분. 그 분이 질문을 되게 잘 하시는데 제게는 오늘 인터뷰가 그 정도로 좋았어요. 저 스스로도 답을 생각하면서 얻게 되는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에 이렇게 허리를 숙이게 되네요. 하하. 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광록
#히어로는아닙니다만
#하이컷인터뷰
Slow Starter
“시작이 느린 대신 중간에 포기 안 하고 완벽하게, 열심히 하려 하죠.” 느리지만 견고하고, 진실돼서 더 찬란한 최광록의 느림의 미학.
|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막방이 6월 초였는데, 그새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요. 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마지막 촬영이 3월 초 끝났으니까 이제 5개월 정도 지났어요. 배역 때문에 30킬로 가까이 증량했던 몸무게를 20킬로 후반 가까이 뺐는데, 나름 건강하게 감량했어요. 서른 중반이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건강한 식단에 운동을 병행했네요.
| 와, 다이어트 쉽지 않았을 텐데. 또 어떻게 지냈어요?
최근엔 저만의 일상을 좀 보내면서 제가 좋아하는 곳들을 많이 가려 했어요. 반려묘랑 시간 많이 보내고, 커피를 되게 좋아해서 카페도 다니고, 얼마 전엔 오사카 도보 여행도 다녀왔고요. 이제는 또 다음 작품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있는데…
| 차기작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만 기사로 접하겠습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보면서 형태가 계속 눈에 밟혔어요. 무뚝뚝한 듯 다정하고, 진지한데 엉뚱해서 자꾸만 시선이 가는 캐릭터랄까? 평소 성격과도 닮았나요?
사실, 처음 대본을 볼 때는 항상 막막한 것 같아요. 데뷔작 <그린마더스클럽> 때도 그랬는데, 캐릭터가 저와는 너무 다른 인물 같아 장애물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공통점을 찾으려 계속 노력했어요. 연기하는 인물이 저와 정말 똑같다고 느낄 정도로.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형태가 나중엔 진짜 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형태와 최광록. 어떤 점이 닮은 것 같아요?
형태가 좀 말이 없잖아요. 저도 지금 말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평소에는 말이 없거든요. 그 부분도 비슷하고, 저도 형태처럼 행동을 먼저 하는 편이에요. 뭘 하더라도 말하기 전에 그냥 바로 일을 시작하는?
| 신인 배우 축에 속하지만, 직장인이라 치면 ‘중고신입’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것 같아요. 배우가 되기 전 이력이 많잖아요. 법학을 전공해 항공 승무원을 하고, 영어 강사, 모델까지. 이 모든 결정은 나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그랬던 거겠죠?
그 질문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친구의 친구들까지 물어봤거든요. 저보고 그만두는 걸 잘한다고. 하하. 법학이라는 걸 전공하고, 그걸 옆으로 치워 놓은 상태에서 승무원이 됐다가, 그것도 치워놓고 다른 일을 쭉쭉쭉 해왔는데 ‘밀고 나가자’는 내적인 확신보다는 후회를 안 할 자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해도 항상 후회는 안 했거든요. 이게 안 되면 그냥 다른 거를 택하면 되니까.
| 그게 진짜 어려운 거 아닌가요? 후회 안 하기.
사실 직장 그만두고 처음엔 후회하긴 했어요. 괜찮을 줄 알고, ‘내 꿈을 찾아가자’고 생각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무래도 생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잖아요. 그래서 알바를 엄청 많이 했어요. 노가다도 하고, 택배 일도 하다 영어 강사 일은 그 뒤에 한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많이 했는데, 밤이 되면 ‘내가 지금 뭐 하려고 여기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긴 했죠.
| 그런 과정이 있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지금의 순간이 더 값지게 느껴지겠네요.
그렇죠. 최종적으로는 후회 없는 선택이었으니까요.
| 한 인터뷰에서 이랬어요. “직장 생활할 때는 나무만 보다가, 그만두고 나서야 숲을 본 기분이 들었다”고.
직장생활을 할 때는 하루 중 너무 많은 시간을 그 곳에만 쏟아붓다 보니 정작 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더라고요. 일터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생활까지 끌고 와서 나를 망치기도 하고,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 안에서 잘하려고 애쓰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우물에 갇혀 있는 것 같단 느낌도 많이 들었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퀘렌시아’처럼 편한지,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거고 어떤 가정을 이끌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로 거기에만 너무 몰두했던 거죠. 그렇게 나무만 보다가, 거기서 한 발자국 빠져나오니 이런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 이런 이력을 보면서 <유 퀴즈> 게스트로 나가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마다 출연자에 따라 ‘누구보다 간절하다’, ‘한 끗 차이’, ‘장안의 화제’ 등 지어지는 소제목이 있는데, 광록 씨가 출연한다면 어떤 소제목이 어울릴 것 같아요?
음… <유 퀴즈>가 저를 불러줄 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감사하게 불러 주신다면 ‘슬로우 스타터’가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느린 게 좋거든요. 여태까지 항상 뭔가를 빨리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직업도 너무 오랜 시간을 우회해서 돌아왔고, 승무원 일도 되게 느리게 돌아와서 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슬로우 스타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작이 느린 대신 중간에 포기 안 하고 완벽하게, 열심히 하려 하죠.
| 조금 돌아갈지언정 결국 원하는 길로 가는 것. “오아시스가 내 최종 목표라면 옆에 사과나무가 있을 수도 있고, 배 나무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식으로 목표를 생각했다“는 과거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그 말을 제가 처음 들었던 게 KBS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패널로 나왔던 홍진경 선배가 그 조언을 사연자한테 해줬거든요. 어린 마음에 그걸 제 모토처럼 가지고 살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한테 공감을 이끌어내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지만, 유명한 배우는 못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못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오늘처럼 이런 재미 있는 일들을 하면 그것들이 과실이 되는 거죠. 훌륭하거나, 남들이 다 알아주는 배우가 되지 못해도 괜찮은 것 같아요.
| 29살에 모델에 도전했고 31살에 배우가 됐어요. 특이한 게, 데뷔작 <그린마더스클럽>에 캐스팅된 후에 연기 공부를 처음 시작했다고요. 우연히 마주한 기회였는데, 그게 또 좋아하는 일이 되어버렸네요.
지금은 연기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사실 그때 당시만 해도 되게 무서웠어요. 저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평범하게 사회가 정한 특정한 틀에 맞춰 성장해 왔고, 집안도 보수적인 편이라 부모님은 제가 대중에 많이 노출되는 일을 하길 원치 않으시기도 했거든요. 그렇게 무서워 하고만 있었는데, 연기하는 친구에게 이걸 배우면서 연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 거죠. 연기에는 그런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 같아요. 연기를 얕게 보고, 흉내만 낸다는 느낌으로 생각하고 대하면 사람들도 다 알거든요. 카메라는 거짓말을 참 잘 잡아내는 것 같아요. 대신 내가 조금 스킬이 부족하고,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이 작품과 인물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고, 진심이라면 감동이 온전히 전해지더라고요. 그게 연기의 묘미인 것 같아요.
| 그런 연기라는 새로운 분야를 경험하고 바뀐 점이나, 새롭게 느낀 점이 있나요?
MBTI를 엄청 믿지는 않지만, 제가 T거든요. INTP. 연기를 시작하기 전엔 상대방에게 겉으로 공감해주는 척하기 위해 자상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쓰면서도, 마음 깊이 공감해주진 않곤 했어요. 감정을 이입하게 되면 하루가 너무 피곤해지니까. 그런데 연기를 시작하면서 겉으로만 하는 공감 말고, 내가 진짜 이 사람의 말에 공감해 주고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그릇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또 제 연기의 진솔함을 더하는 그런 재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점에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 오히려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내키지 않는 공감을 해 주는 일종의 연기를 하다가, 연기를 하게 되며 한층 더 진솔하게 삶을 대하게 된 거네요?
지금도 가끔은 포장을 하긴 하죠. 그런데 그 비율이 줄었어요. (웃음)
|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하나씩 얻을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요.
제일 나쁜 경험은 얻는 게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뭔가에 열정을 쏟았다면 얻는 게 있어야 되잖아요. 저는 각 작품마다 얻은 게 달랐던 것 같아요. 각 시간대의 제가 다 다른 모습이기도 했고요. 2022년 <그린마더스클럽> 때는 감사함에 대해 많이 알게 됐고, 연기가 참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됐죠. 그때 ‘어,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장애물을 느꼈다면 이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할 때는 따뜻함을 많이 느꼈어요. 작중 분위기 그대로 너무 좋은 현장이었거든요. 노형태라는 인물이 형태가 없는 ‘노’ 형태 상태였다가 형태가 생긴 것처럼, 저도 진짜 형태가 생긴 최광록이 되는 과정을 같이 겪었어요.
| 형태가 생긴 최광록은 어떤 사람이에요?
자기 확신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데 너무 눈치를 많이 보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 썼다면 지금은 내 일, 내 연기, 내 작품 등 제 신념과 관련된 일이라면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바뀌었죠.
| 영화 얘기도 하고 싶어요. 단편 영화도 제작했다고 봤는데, 정보가 많이 없더라고요.
<벌스데이 맨>이라는 작품이에요. 처음에 연기 시작할 때 배우로 활동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스터디를 했는데, 그때 습작식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ASMR이 크게 유행할 때 관련 콘텐츠를 찾아보다가, 19세 ASMR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되게 특이하죠? 그게 듣는 이들의 성적 판타지를 채워주는 ASMR인데, 사람이 혼자 독백식으로 연인에게 생일 이벤트 같은 걸 해 주는 상황극 같은 걸 녹음하는 거예요. 숨소리도 이렇게 내면서. 그걸 토대로 만든 영화인데 처음엔 커플인 듯한 남자가 등장해서 여자한테 생일 축하도 해 주고, 마사지도 해주는 야릇한 상황이 펼쳐지다 갑자기 땅! 깨지면서 화면이 전환되는 거죠. 알고 보니 남자는 마이크를 두고 ‘자기야’ 이러면서 혼자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고, 여자는 외로워서 퇴근하고 항상 그걸 들었던 거예요. 마지막엔 혼자 “생일 축하해” 말하고, 초를 훅 불면서 끝나는 그런 영화예요.
|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잘 반영한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보여주실 생각은 없나요?
편집은 사실 다 됐는데, 부끄럽지만 영화제에 낼 수 있으면 내 봐야죠.
| 이런 소재에 대한 영감은 일상에서 자주 얻나 봐요.
이상한 상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또 재미있는, 연기와 관련된 상상들이 조금씩 나오기도 하고요.
| 연기와 다른 영화 제작만의 매력은요?
일단 앞으로 할 생각은 없습니다. <벌스데이 맨> 때는 친구들과의 패기와 열정으로 한 거지, 쉽지 않더라고요. 물론 연기자도 연기를 하는 플레이어인 동시에 신을 책임지는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지만 연출은 조금 더 거시적으로 많이 보고 세세하게 신경을 더 많이 써야 돼요. 그런 점이 연기와 다르기도 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연기에만 집중하는 걸로.
| 좋아하는 감독으로 쿠엔틴 타란티노를 꼽으며 “영화와 예술이 어떤 메시지를 주기보다 즐겁고 카타르시스를 주면 그게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하신 적 있죠.
그게 좀 강하게 적히긴 했는데, 어려운 건 제가 거부감이 들어요. 아름다움과 작품성은 너무 와 닿지만, 더 많은 대중을 한번에 공감시키는 작품이 저는 더 재미있게 느껴져요. 사람마다 재미의 정의가 다르겠지만, 제겐 그런 게 재미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이라는 작품을 택한 것도 있고요. 저한테도 재미있어야 되고, 보는 사람에게도 재미있어야 되니까요. 실제로 촬영하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지금까지도 너무 친하게 지내고, 이렇게 따뜻한 현장은 많이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 그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 아닐까요? 그래서 더 최광록의 다음 챕터가 궁금해요.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챕터가 항상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목표나 계획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제 챕터를 정하는 것보다는, 제게 주어진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고 그냥 올인을 해 보고 싶어요. 주어진 순간에, 한 작품에 모든 걸 다 태워버리는 거죠. 저는 항상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이게 제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히어로는 아닙니다만>도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좋은 기회가 왔고, 그것 역시 제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임할 거고.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여러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 얼마 전 광록 씨의 피드에서 웃긴 댓글을 봤는데, 보셨어요? “왜자꾸 B컷 사진만 올리지..., Best(최고의)컷, Beautiful(아름다운)컷, Bright(빛나는)컷, Blessed(축복받은)컷, Buy(제가구매합니다)컷, Bring(제가썸쳐갑니다)컷, Breathe(숨이트이게해주는)컷, Benefit(개이득)컷, Burn(마음이화끈해지는)것, Bend(감삼다하면서허리숙이게해주는) 컷, Battery(사랑의배터리)컷.”
네, 하하. 재밌죠. 살면서 누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경우가 없잖아요. 심지어 연인도 그런 식으로 말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고요. 그런 걸 들을 때 너무 고맙고, 귀엽고, 감사하죠.
| 그렇다면 영상이긴 하지만, 오늘 촬영은 어떤 B컷이 될 것 같나요?
Bend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은.
| 왜일까요?
이승국 님 있잖아요, 영어로 할리우드 배우 인터뷰하는 분. 그 분이 질문을 되게 잘 하시는데 제게는 오늘 인터뷰가 그 정도로 좋았어요. 저 스스로도 답을 생각하면서 얻게 되는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에 이렇게 허리를 숙이게 되네요. 하하. 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에디터 문혜준
영상 지민혁